2026. 2. 3. 17:59ㆍ시의 마을
겨울 시모음
겨울은 시가 가장 깊어지는 계절입니다. 자연은 소리를 낮추고 색을 줄이지만, 그만큼 인간의 내면은 또렷해집니다. 눈과 바람, 차가운 공기와 긴 밤은 사유를 밀어 올리고, 시는 그 사유의 가장 응축된 형태로 겨울에 머뭅니다.

한국 현대시와 서정시 속의 겨울은 단순한 계절 묘사가 아니라 그리움, 인내, 신앙, 상실, 그리고 삶의 지속을 견디는 태도까지를 품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 시모음은 ‘눈’, ‘바다’, ‘나그네’, ‘약속’이라는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각 시가 담고 있는 정서와 의미를 차분히 읽어 내려가며 감상과 해설을 함께 정리한 구성입니다. 시마다 개별적인 감상평과 해설을 덧붙이고, 동일 시인의 경우에는 시인 프로필을 묶어 정리하여 흐름을 끊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해인 - 겨울 편지
겨울 편지 - 이해인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되는 눈 오는 날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네 이름을 불러본다
이 시의 감상은 단순한 그리움에서 출발하지만, 읽을수록 감정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눈이 쌓이는 공간의 나열은 물리적 거리의 확장을 의미하고, 그 확장은 곧 마음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눈사람이 된다는 표현은 그리움이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형태를 갖춘 존재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조용히 내리는 눈과 목소리, 눈송이와 마음을 병치하는 방식은 이해인 특유의 맑은 이미지 감각을 잘 보여줍니다.
해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겨울을 ‘단절의 계절’이 아니라 ‘연결의 계절’로 전환합니다. 눈은 시야를 가리지만, 동시에 기억과 목소리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됩니다. 겨울의 고요함 속에서 오히려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관계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서정시로 읽힙니다.

이해인 - 겨울 노래
겨울 노래 - 이해인
끝없는 생각은
산기슭에 설목(雪木)으로 서고
슬픔은 바다로 치달려
섬으로 엎드린다고해소에 앉아
나의 참회를 기다리는
은총의 겨울더운 눈물은 소리없이
눈밭에 떨어지고
미완성의 노래를 개켜 들고
훌훌히 떠난 자들의 마을을 향해나도 멀리 갈길을 예비한다
밤마다 깃발 드는
예언자의 목쉰 소리오늘도
나를 기다리며
다듬이질하는 겨울
이 시는 겨울을 신앙의 시간으로 확장합니다. 설목과 바다, 고해소와 눈물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정화 과정을 상징합니다. 감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은총의 겨울’이라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겨울은 결핍과 고통의 계절로 인식되지만, 이 시에서는 참회와 준비의 시간으로 재해석됩니다.
해설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떠난 자들을 향해 갈 길을 예비하는 화자는, 겨울이 끝나기 전에 자신을 다듬습니다. 다듬이질하는 겨울이라는 표현은 계절이 인간을 연마하는 존재처럼 그려지며, 고통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성숙을 암시합니다.

김현태 - 겨울 약속
겨울 약속 - 김현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했던가요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간직한다고
우리가 나눈 것은 차라리 사랑이라고
그대가 남기고 간 눈빛 하나에
나는 여태 오도 가도 못하고
겨울나무 곁에 서성입니다함께 나눈 나날을 돌이켜 보면
눈물에 투영된 그대 모습이 전부이지만
그래도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약속 때문이겠지요첫눈이 오면 다시 만나자고 한
그대도 없이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강가에 내려 앉은 산 그림자마저
겨울잠을 자는데 그대는 오지도 않고
나는 또 한 그루 겨울나무가 되어갑니다
이 시의 감상은 정지된 시간에 머무는 체험입니다. 약속은 미래를 향한 말이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현재를 묶어두는 족쇄처럼 작용합니다. 겨울나무는 움직이지 않는 기다림의 형상이며, 그 곁을 서성이는 화자는 시간 속에서 고립됩니다.
해설의 측면에서 이 작품은 ‘오지 않는 미래’를 다룹니다. 첫눈이라는 조건부 약속은 계절적 운명에 기대고 있지만, 결국 약속의 주체는 부재합니다. 겨울잠을 자는 자연과 대비되는 화자의 각성 상태는, 그리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속인지 보여줍니다.


박남준 - 겨울 풍경
겨울 풍경 - 박남준
겨울 햇볕 좋은 날 놀러 가고
사람들 찾아오고
겨우 해가 드는가
밀린 빨래를 한다 금세 날이 꾸무럭거린다
내미는 해 노루꽁지만하다
소한대한 추위 지나갔다지만
빨랫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쩍버썩 뼈를 곧추세운다
세상에 뼈 없는 것들 어디 있으랴
얼었다 녹았다 겨울빨래는 말라간다
삶도 때로 그러하리
언젠가는 저 겨울빨래처럼 뼈를 세우기도
풀리어 날리며 언 몸의 세상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안이 되기도 하리라
처마 끝 양철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반짝인다
지난 늦가을 잘 여물고 그중 실하게 생긴
늙은 호박들 이집 저집 드리고 나머지
자투리들 슬슬 유통기한을 알린다
여기저기 짓물러간다
내 몸의 유통기한을 생각한다 호박을 자른다
보글보글 호박죽 익어간다
늙은 사내 하나 산골에 앉아 호박죽 끓인다
문밖은 여전히 또 눈보라
처마 끝 풍경 소리 나 여기 바람 부는 문밖 매달려 있다고
징징거린다
이 시는 생활의 리듬으로 겨울을 그립니다. 감상에서 주목할 점은 일상의 세밀한 관찰입니다. 빨래, 고드름, 호박죽 같은 사소한 소재들이 겨울의 생존과 맞닿아 있습니다. 겨울은 관념이 아니라 몸의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해설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삶의 유통기한을 자각하는 시입니다. 겨울빨래와 호박의 짓무름은 인간의 시간성을 은유합니다. 그러나 호박죽을 끓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겨울은 끝이 아니라 이어짐의 계절로 남습니다.


김남조 - 겨울 바다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이 시의 감상은 냉혹한 진실과 마주하는 체험입니다. 겨울 바다는 낭만이 아니라 인고의 공간이며, 시간은 가장 엄격한 스승으로 등장합니다. 기도의 언어는 절망 이후에 도달하는 내적 결단을 보여줍니다.
해설에서는 이 시를 성찰의 시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남은 날이 적다는 인식은 체념이 아니라 집중을 낳습니다. 겨울 바다는 끝이 아니라, 더 뜨거운 기도의 문으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김현승 - 겨울나그네
겨울나그네 - 김현승
내 이름에 딸린 것들
고향에다 아쉽게 버려두고
바람에 밀리던 플라타나스
무거운 잎사귀 되어 겨울길을 떠나리라구두에 진흙덩이 묻고
담쟁이 마른 줄기 저녁 바람에 스칠 때
불을 켜는 마을들은
빵을 굽는 난로같이 안으로 안으로 다스우리라그곳을 떠나 이름 모를 언덕에 오르면
나무들과 함께 머리 들고 나란히 서서
더 멀리 가는 길을 우리는 바라보리라재잘거리지 않고
누구와 친하지도 않고
언어는 그다지 쓸데없어 겨울옷 속에서
비만하여 가리라
눈 속에 깊이 묻힌 지난 해의 낙엽들같이낯설고 친절한 처음보는 땅들에서
미신에 가까운 생각들에 잠기면
겨우내 다스운 호올로에 파묻히리라얼음장 깨지는 어느 항구에서
해동의 기적소리 기적(奇蹟)처럼 울려와
땅속의 짐승들 울먹이고
먼 곳에 깊이 든 잠 누군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이 시의 감상은 떠남의 윤리입니다. 화자는 친교와 언어를 줄이며, 겨울옷 속에서 비만해지는 존재가 됩니다. 이는 고독의 부정이 아니라, 고독을 감내하는 태도입니다.
해설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자기 절제의 시입니다. 겨울은 나그네를 말없이 단련시키며, 결국 해동의 순간을 준비하게 합니다.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의 감상은 겨울의 낭만과 저항입니다. 눈은 세계를 덮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을 상상하게 합니다. 산골로 가자는 제안은 도피가 아니라 가치의 선택입니다.
해설에서는 이 시를 사랑과 윤리의 시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버린다는 선언은, 겨울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기준을 세우는 행위입니다.

시인 프로필 묶음
이해인은 인간의 신앙과 일상을 결합한 서정으로, 겨울을 은총의 시간으로 확장한 시인입니다. 김현태는 상실과 약속의 정서를 담담하게 풀어내며,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감정으로 전환합니다. 박남준은 농촌과 일상의 풍경 속에서 생의 유한성을 직시하는 시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김남조는 시간과 인내를 주제로 한 성찰적 시 세계를 구축했으며, 김현승은 고독과 절제를 통해 존재의 윤리를 탐구합니다. 백석은 언어의 질감과 상상력을 통해 겨울을 가장 인간적인 사랑의 계절로 재탄생시킨 시인입니다.
결론
겨울 시는 차갑지만 냉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이 겨울이라는 시간 속에서 응결됩니다. 눈은 그리움을 드러내고, 바다는 인내를 가르치며, 나그네의 길은 삶의 태도를 묻습니다. 이 시모음은 겨울을 견디는 여러 방식의 기록이며, 각 시는 저마다의 온도로 독자의 마음에 머뭅니다. 겨울을 지나며 다시 읽고 싶은 시들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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